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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카지노·26. 10. 09.

길바닥에 흘린 쌀, 카지노의 35억원…롤러코스트 인생

홍춘봉편집국 기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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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길바닥으로 쏟아졌다.

 

자전거가 웅덩이에 넘어지는 순간, 뒤에 실었던 비닐 포대가 터졌다. 쌀 20㎏이 도로변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물에 잠겼고 일부는 흙바닥에 떨어졌다.

 

박상우씨는 쓰러진 자전거 옆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렵게 마련한 500페소로 산 쌀이었다. 다시 가게로 돌아가 한 포대를 더 살 돈은 없었다. 마닐라 외곽의 집에서는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가족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그는 길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쌀을 쓸어 모으고 손가락으로 낟알을 긁었다. 흙과 물이 섞였지만 버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야 했다.

 

찢어진 포대는 더 이상 쌀을 담지 못했다. 그는 상의를 벗었다. 주워 모은 쌀을 옷에 담았다.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왜 고국을 떠나 머나먼 필리핀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이 쌀이 없으면 우리 식구들은 굶게 생겼는데…….”

 

필리핀 현지에서 전해 들은 박씨의 도피생활은 이 장면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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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그는 마카오 윈 카지노에서 세 시간도 되지 않아 35억원을 잃었다고 지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15억원을 더 빌렸다.

 

쌀 한 포대를 지키려고 길바닥을 긁던 손과 바카라 테이블에서 거액을 잃던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이었다.

 

박상우는 가명이다. 2026년 기준 58세인 그는 2010년 여름 가족과 함께 인천공항을 떠났다. 당시 한국에서 사기 혐의로 수배되기 직전이었다.

 

목적지는 마닐라였다.

 

가족을 데리고 출국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도착한 뒤 살아갈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중의 돈은 거의 바닥났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말까지 통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오래갈 형편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도 가족은 매일 먹어야 했고 잠잘 곳이 필요했다.

 

박씨가 가진 것은 브레이크도 없는 낡은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 뒤에 쌀을 싣고 돌아오던 날, 그는 가난이 무엇인지 다시 몸으로 겪었다.

 

쌀을 담은 옷을 움켜쥐며 다짐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지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겠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이곳에서 가족을 지키려면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날의 다짐은 절박했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심이 돈을 버는 방법까지 가려주지는 않았다.

 

마닐라에서 알게 된 한국인 가운데 온라인 카지노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씨는 그에게 일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돈벌이를 찾지 못하던 그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업은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박씨는 일을 하면서 온라인 카지노 운영을 배웠다.

 

약 1년 뒤, 다른 한국인과 동업을 시작했다.

 

운영하는 사람들은 필리핀에 있었지만 고객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었다. 박씨가 떠나온 나라에서 돈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활이 바뀌기 시작했다.

 

박씨와 가까이 지냈던 교민 A씨는 초창기의 그를 돈을 모으는 데 철저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술 한 잔도 아꼈다. 벌었다고 쓰지 않았다. 들어오는 돈을 계속 쌓았다.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벌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분명히 아는 듯했다.

 

쌀을 주워 담던 기억이 그를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한 포대를 다시 살 수 없었던 처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돈은 온라인 도박 사업에서 나왔다. 박씨의 집에 먹을 것이 늘고 재산이 쌓이는 동안, 바다 건너에서는 누군가 돈을 잃고 있었다.

 

A씨의 회고에 따르면 박씨는 2014년 수십억원의 재력을 갖췄고, 2015년에는 재산이 100억원대에 이르렀다.

 

정확한 자산 규모를 확인할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지켜본 생활은 돈이 어디까지 그의 삶을 바꿨는지 보여줬다.

 

박씨 가족은 약 45평의 고급 맨션을 임차했다. 보증금만 20억원에 달했다고 A씨는 전했다. 아들은 학비가 비싼 외국인 학교에 보냈다.

 

먹을 쌀을 걱정하던 가족이 좋은 집과 학교를 선택하게 됐다.

 

아내와 아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하던 가장은 이제 원하는 것을 사줄 수 있었다.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라면 꿈꾸기 어려웠을 생활이었다.

 

그런데 돈을 모으던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돈을 쓰는 사람이 됐다.

 

박씨 부부는 카지노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가구와 의류, 자동차를 사는 데 흥청망청 돈을 썼다. 유흥과 명품 쇼핑도 생활에 들어왔다.

 

A씨는 한 달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벌기도 했지만, 지출 역시 흥청망청했다고 회고했다.

 

들어오는 돈이 커지자 나가는 돈의 기준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돈을 쓰고 남은 금액을 걱정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음에 들어올 돈을 믿었을지 모른다. 술 한 잔을 아끼던 사람이 카지노에서 수십억원을 잃고도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 A씨의 기억이었다.

 

길바닥의 쌀은 여전히 그의 과거였다.

 

그러나 그 과거가 더 이상 오늘의 씀씀이를 붙잡지는 못했다.

 

2016년 여름, 박씨는 아내와 마카오로 떠났다. 일주일 동안 관광하고 쇼핑할 계획이었다.

 

숙소는 윈 카지노가 있는 호텔이었다. 여행을 위해 마련한 돈은 35억원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 돈이면 여행 중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 돈이 사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서너 시간쯤 지났을 때, 마닐라에 있던 A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마닐라에 돌아가게 됐어.”

 

A씨는 의아했다. 이제 막 도착했을 사람이 다음 날 돌아온다고 했다.

 

“아니, 일주일 동안 관광도 하고 쇼핑도 한다더니…….”

 

박씨가 사정을 설명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카지노로 갔다. 바카라를 했고, 세 시간도 되지 않아 가져간 돈을 전부 잃었다는 것이다.

 

35억원이었다.

 

얼마씩 걸었는지, 몇 차례 이기고 졌는지, 마지막 돈을 잃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집만 당시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주일 여행이 몇 시간 만에 끝났다는 사실은 A씨의 기억에 선명했다.

 

박씨는 돈을 잃었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꽁지돈 15억원을 빌려 마누라와 쇼핑하고 내일 비행기로 돌아갈 거야.”

 

가진 돈이 사라졌는데 쇼핑은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빌린 돈으로 채우겠다는 말이었다.

 

35억원을 잃은 뒤에도 15억원을 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그의 재력과 주변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빌린 돈은 결국 갚아야 할 돈이었다.

 

그는 부부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신, 거액의 손실과 빚을 안고 마닐라로 돌아가야 했다.

 

500페소가 없어 쌀을 다시 사지 못했던 사람.

 

그가 이제는 35억원을 잃고, 15억원을 빌렸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하고 있었다.

 

돈의 액수가 커지면 돈을 잃는 고통도 같은 비율로 커질까. 박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돈이 많아지는 동안 돈을 대하는 감각도 변해 있었다.

 

A씨는 박씨 부부가 카지노를 자주 즐겼다고 말했다.

 

“남편이 잃으면 부인이 그보다 더 많이 따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잃은 돈을 되찾았다는 경험은 다음 손실 앞에서도 기대를 남길 수 있다. 다만 그 기억이 부부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따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A씨가 전한 생활은 풍족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카지노에 다녔다.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아 박씨의 아랫배가 불룩해졌다고 했다. 보석과 명품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생일에 수백만원짜리 가방이나 보석을 선물하는 일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을 굶기지 않겠다던 다짐은 이미 이뤄졌다.

 

그다음부터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있었을까.

 

좋은 집을 유지하고, 비싼 소비를 이어가고, 카지노에서 잃은 돈을 메우는 생활에는 계속 돈이 필요했다.

 

온라인 카지노는 그에게 돈을 벌어주는 사업이었다. 실제 카지노는 그 돈을 잃는 장소였다. 박씨는 두 곳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그해 10월, 돈으로 누리던 생활에 다른 문제가 닥쳤다.

 

한국과 필리핀 경찰의 공조수사로 붙잡혔다고 A씨는 전했다. 한국으로 송환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바카라에서 얼마를 잃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이 붙잡혔다. 좋은 집도 자동차도 그 순간의 신병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박씨는 평소 친분을 쌓아둔 현지 경찰 간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A씨의 회고에는 100만페소라는 액수가 등장한다. 자신을 풀려나게 해주면 지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현지 경찰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한국 경찰에 신병을 넘기는 일을 늦췄다. 박씨를 조사실로 데려간 뒤에는 뒷문으로 내보냈다. 필리핀 경찰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화끈하게' 봐주기 수법이다.

 

한국 경찰이 신병 인계를 기다리는 동안, 박씨는 경찰서를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다.

 

A씨는 박씨가 집으로 돌아가 경찰 간부에게 약속한 돈을 지급했다고 말했다. 이어 태국으로 도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위조여권도 요청했다는 설명이다.

 

붙잡힌 뒤 풀려났지만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음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A씨에 따르면 박씨 등 한국인 다섯명을 인계받으려던 한국 경찰은 현지 경찰로부터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며, 이들은 불구속 수사를 위해 석방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송환을 위해 필리핀까지 갔던 한국 경찰은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박씨가 향한 곳은 태국이었다고 A씨는 전했다.

 

그 뒤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이름으로 어디에서 살았는지, 재산을 얼마나 남겼는지, 가족과 함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생사 여부도 취재 과정에서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A씨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돈을 벌어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또 다른 나라로 떠나는 도피자였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마닐라 외곽에서 막막해했다. 그다음에는 거액을 벌어 좋은 집에 살았다.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아내와 해외여행을 했다.

 

그러나 돈이 그의 출국 사정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가족을 위해 벌었다는 말이 온라인 도박 사업의 성격을 바꾸지도 못했다.

 

쌀을 주워 담던 날, 박씨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바람을 이루는 데 반드시 100억원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재산이 쌓인 뒤 그의 생활은 더 비싼 소비와 더 큰 판돈으로 옮겨갔다.

 

35억원을 들고 떠난 일주일 여행은 몇 시간 만에 끝났다. 경찰서에서 풀려났다는 날에는 다음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길바닥에 흩어진 쌀은 손으로 다시 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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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삶에는 무엇을 보태야 했을까.

 

그 질문의 답을 남기지 않은 채 박씨는 사라졌다. 그의 이야기에는 여전히 두 장면이 남아 있다. 옷에 쌀을 담고 울던 남자, 그리고 35억원을 잃었다며 내일 돌아가겠다고 전화하던 남자.

 

그 사이에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가족과 안심하고 살아갈 자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초심을 잃은 사람의 말로는 박씨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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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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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봉기자

카지노 이슈와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K-Journal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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