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반대편으로 달린 한국인 목격자
3층에 있던 K씨 주변에도 100명가량의 고객과 직원이 있었다.
처음 총성이 들렸을 때 일부는 계단과 출구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테러범이 여러 명일 수 있다”는 말이 돌면서 상당수는 VIP룸 안쪽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K씨는 반대로 움직였다.
“테러범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지만 연기가 올라오는 방향은 보였습니다. 총성이 들리는 쪽과 연기가 퍼지는 쪽을 피해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연기 반대편으로 나가야 합니다!”
천장 부근부터 검은 연기가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졌고 숨을 쉴 때마다 목이 따가웠다.
K씨는 사람들과 몸을 낮추고 이동했다. 누군가는 신발이 벗겨졌고 누군가는 넘어졌다. 복도에는 휴대전화와 가방, 카지노 칩이 흩어져 있었다.
경보음과 비명, 기침 소리가 뒤엉켰다.
그는 가까스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에서는 부상자들이 바닥에 누워 있었고, 창문을 깨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사람도 있었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속속 도착했지만 내부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K씨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카지노 안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젊은 딜러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착하고 성실한 직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중 여러 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5층 호텔방에서 끝난 도주
카지노 칩을 훔친 카를로스는 진압 병력과 충돌한 뒤 인접한 맥심호텔 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5층 객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경찰이 접근하자 카를로스는 객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 이어 스스로 총을 쏜 것으로 조사됐다.
새벽 1시가 넘어 객실 안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범행은 끝났지만 카지노 내부의 연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구조대가 건물 곳곳을 수색하면서 희생자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카지노 직원과 고객 등 36명이 화재와 연기 흡입 등으로 사망했다. 범인까지 포함하면 현장 사망자는 37명이었다. 70명가량이 다치거나 병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인 사망자도 있었다. 현지 발표에 따르면 이 한국인은 대피 과정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카지노 테러’라는 보도가 세계로 퍼졌다. IS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핀 경찰은 정치적·종교적 목적의 테러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조직적인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도박 빚과 개인적 파탄에 몰린 전직 공무원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것이 아니라 칩 보관시설로 향했고, 1억1300만 페소 상당의 칩을 훔쳤다.
마닐라 경찰은 “한 사람의 단독 범행이며 테러와 관련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범행 동기가 테러가 아니었다고 해서 참사의 공포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카지노 출입금지가 막지 못한 파국
카를로스의 이력은 사건을 더욱 충격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범죄자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이 있었고 세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그러나 카지노와 투계에 빠지면서 빚이 늘어났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더 큰돈을 걸었고, 재산을 처분해 다시 도박자금을 만들었다. 공직에서도 물러났고 가족과의 관계도 깨졌다.
가족들은 그의 카지노 출입을 막아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출입금지 조치는 내려졌지만 치료와 채무 문제, 심리적 위기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는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도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분노와 절망을 키웠다.
사건 전 카를로스를 카지노에서 봤다는 K씨는 그의 변화를 기억했다.
“예전에는 성격이 원만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카지노 출입이 잦아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졌고 사람도 달라졌습니다. 게임할 때 뒤에서 덩치 큰 남성이 지켜보는 모습도 봤습니다.”
K씨는 그 남성을 카를로스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 측 인물로 추정했다. 다만 이 부분은 수사기관이 공식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확실한 것은 카를로스가 거액의 빚과 실직, 가족 해체를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박중독은 그에게 돈만 빼앗지 않았다.
직업을 잃게 했고 가족을 떠나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현실을 판단하는 힘까지 무너뜨렸다.
▲참사를 키운 보안과 대피의 실패
이 사건은 한 사람의 범행으로 시작됐지만 36명의 피해자가 숨진 원인을 범인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소총과 휘발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카지노 내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총성이 울린 뒤 경보와 안내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밀폐된 공간에 숨은 고객들을 왜 신속하게 구조하지 못했는지가 도마에 올랐다.
리조트월드 마닐라 경영진은 필리핀 의회 조사에서 일부 보안요원이 지정된 위치를 지키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했다.
총격범의 위치와 화재 상황을 정확히 알리는 안내가 부족했던 점도 피해를 키웠다. 총격범에게서 몸을 숨긴 사람들이 화재와 유독가스에 노출되는 역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카지노에는 13개의 비상구가 있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총성과 테러 공포 속에서 고객들이 비상구의 위치를 파악하고 질서 있게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비상구가 존재하는 것과 실제 재난에서 작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필리핀 정부와 의회에서는 카지노 측의 보안 실패와 안전관리 부실을 질타했다. PAGCOR는 조사 기간 리조트월드 마닐라의 카지노 영업허가를 일시 정지했다. 카지노는 같은 달 말 영업을 재개했다.
▲화염 속에서 사라진 또 다른 칩들
사건이 발생하자 카지노 안에 있던 고객과 직원들은 소지품을 챙길 겨를도 없이 빠져나왔다.
테이블 위와 칩 트레이, 영업장 내부에는 현금처럼 취급되는 게임용 칩이 그대로 남았다.
범인이 훔친 1억1300만 페소 상당의 칩은 공식적으로 회수됐다. 그러나 사건 이후 현지 카지노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화재 진압과 수색 과정에서 별도의 칩이 대량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일부 직원에게는 “사고 당시 확보한 칩을 현금으로 바꾸면 절반을 주겠다”는 연락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수억 원어치 칩이 있으니 환전해주면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이 여러 차례 들어왔습니다. 훔친 칩이라면 자진 반납하라고 했고, 환전을 시도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현지에서는 일부 칩을 소방대원이나 경찰관, 구조 과정에 출입한 사람들이 가져갔을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연기와 그을음으로 CCTV 영상의 식별이 어려웠다는 주장만 나왔을 뿐, ‘1000억 원 이상의 칩이 분실됐다’는 소문이나 절취 주체는 공식 수사 결과로 확인되지 않았다.
재난의 혼란 속에서 실제로 얼마의 칩이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후 출처가 의심되는 칩을 환전하려다 적발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현지 관계자들의 증언은 이어졌다.
사람들이 죽어간 참사 현장에서 누군가는 버려진 칩을 주웠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현금으로 바꿀 방법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이 남긴 또 하나의 ‘요지경’이었다.